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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칼럼

섬진강을 걷다. 진안 백운면에서 임실 사선대까지

by 눌산 2008. 5.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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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 여행자에게 왜 걷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산악인에게 등산을 왜 하고, 낚시광에게 낚시를 왜 하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 각자의 취향에 맞는 취미와도 같기 때문이다. 도보 여행자에게 있어 길은, 권투선수의 스파링 파트너 같은 것이다. 길이 있어 걷고, 그 길이 끝나는 곳에서 또 여행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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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리에서 만난 섬진강

강은 산을 넘지 못한다.

섬진강 도보여행은  전라북도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데미샘에서 시작한다. 데미샘을 출발해 협착한 골짜기를 벗어나 처음으로 만나는 너른 들이 동창리. 작은 도랑이 또 다른 도랑을 만나며 몸을 불린 섬진강은 동창리에서 부터 비교적 강다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섬진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 덕태산(1,113m)과 선각산(1,142m)의 마루금과 마주 보고 있는 덕현리 일대는 담배농사가 주업이다. 삼복더위와 장마철 내내 담배잎을 따고 건조시키는 과정을 반복하는 담배농사는 농사 중의 상농사로 친다. 그만큼 힘들고 고된 과정이기 때문. 옛날에는 황토흙으로 흙장(흙벽돌)을 찍어 쌓은 담배 건조막에서 담배잎을 건조시켰지만 요즘은 건조기계를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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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민속자료 36호인 운교리 물레방아

원덕현 상덕현 서촌 동산 윤기 봉서마을 등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진 덕현리를 벗어나면 운교리. 금방이라도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은 낡은 물레방아간이 섬진강에 바싹 붙어 있다. 전라북도 민속자료 36호인 '운교리 물레방아'다. 1850년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규모는 전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20호로 지정된 전통 매사냥꾼 고 전영태 옹이 평생을 운영해 왔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전 옹은 4년 전 돌아가셨다. 아쉬움일까, 주인 잃은 빈 물레만이 빗물을 받아 힘겹게 돌고 있다.

직선으로 흐르던 강은 크게 'S'자를 만들며 저 멀리 산 밑을 돌아 흐른다. 강은 산을 넘지 못하지만 길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제 편한대로 직선을 만든다. 직선은 불안하다. 도보여행을 하며 걸었던 길을 되돌아보면, 직선보다 곡선이 더 편안하다. 그건 모퉁이 돌아 만날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기도 하겠다.

잠시 강을 멀리하고 걷다보니 방화마을에 닿는다. 날렵하게 흘러내린 한옥의 지붕선이 아름다운 마을 정자가 객을 반긴다. 삼복더위 땡볕 아래서 걷다 산들바람 불어오는 정자에 올라 앉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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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김지연 씨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

운교리 물레방아간이 수백 년 세월의 무상함 속에 스러져간다면 계남마을에서 만난 정미소는 사라질 뻔 한 위기를 모면하고 제 2의 생을 살고 있다. 사진작가 김지연 씨가 운영하는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다.

"정미소가 사라지는 것을 보존하고 그 안에서 문화활동을 하고 싶었다."는 김 씨는 10여년 가까이 전국의 정미소와 이발소만을 주제로 사진작업을 해오고 있다. 그의 이력은 독특하지만 정미소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의외이다 싶을 정도로 그의 작품이 없다. 마을 주민들의 오래된 빛바랜 사진들만이 걸려 있을 뿐이다.

주민과 동화된 삶 속에서 그의 작품도 빛을 발하는 법, 굳이 자신의 작품을 걸어 외지인 취급을 받는 것보다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며 진정한 계남마을 주민이 되고자 했던 모양이다. 부디 그의 열정 속에 사라질 뻔했던 이 시골 작은 정미소가 세상 사람들에게 농촌의 혼을 심어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마령면에 들어서자 비로소 진안의 상징과도 같은 마이산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쫑긋 세운 두 귀가 영락없는 '말의 귀'를 닮았다. 실지렁이처럼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 물줄기가 거미줄처럼 얽힌 도랑물을 연거푸 받아들여 강은 이제 제 모습을 뽑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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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건너로 붉은 양철지붕의 계남정미소가 보인다.

전라북도 최고의 정자로 손꼽히는 수선루를 만난 건 강정교차로에서 도로를 버리고 농로로 접어들고서였다. 앞으로는 섬진강이, 뒤로는 거대한 절벽이 버티고 선 자리, 옹색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좁은 틈새를 비집고 수선루가 자리하고 있다. 반은 동굴 속에 몸을 감추고 나머지 반만이 밖으로 드러난 수선루에 올라서면 산허리를 휘감고 돌아 나가는 섬진강 절경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조선 숙종 12년 연안 송 씨, 진유 명유 철유 서유 네 형제가 선조의 덕을 기리고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오는데, 여든이 넘어서도 이 정자에 올라 시문과 바둑을 즐겼던 송 씨 형제의 풍류가 마치 신선이 노는 것과 감다하여 수선루(睡仙樓)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자연 동굴 속에 위층과 아래층이 엇비슷하게 맞물린 자유로운 모습이 독특하다.

사선대에 들어서자 해는 이미 서산으로 넘어간 후였다. '지금으로 부터 3천3백여 년 전 어느 따뜻한 봄날, 진안의 마이산과 임실의 운수산에 살고 있던 신선이 저마다 선녀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내려와 맑은 냇물에 목욕한 후 바위 위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는데, 이때 하늘을 날던 까마귀가 두 신선, 두 선녀와 함께 어울려 놀기를 즐겨했다.' 이러한 유래로 사선대라 했고, 강이름을 오원강(烏院江), 바위는 놀음바위, 동네는 오천리(烏川里), 또는 선천리(仙川里)라 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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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대에서 바라 본 관촌의 오원강(섬진강)


[Tip] 데미샘을 떠난 섬진강은 크고 작은 도랑을 만나 30번 국도상에 있는 진안군 백운면 동창리에 이르면 제법 강폭이 넓어진다. 덕현리와 운교리 물레방아를 지나 강정리까지는 비교적 한적한 코스로 쉬어가기 좋은 정자가 마을마다 있어 여유롭게 걸을 수 있다. 마이산이 보이기 시작하는 마령면 소재지를 지나 수선루가 있는 강정리까지는 강을 따라 제방 위를 걸을 수 있다. 강정리에서 부터는 도로와 제방 위를 오가며 관촌 사선대까지 이어진다. '공동체 박물관  계남정미소(www.jungmiso.net)'는 월요일 휴무를 제외하고 오전 11시 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 


<글, 사진> 최상석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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