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칼럼

[주간조선] 이야기가 있는 소읍(小邑) 기행 9/ 충북 영춘, 전남 곡성

by 눌산 2017. 6. 12.
728x90
반응형

 

 

너른 강과 깊은 골짜기가 그림처럼 펼쳐지는…

이야기가 있는 소읍(小邑) 기행 아홉 번째 / 충북 영춘, 전남 곡성

 

영춘초등학교 맞은편 도로에서 내려다 본 영춘 면소재지 전경. 남한강이 곡류하고, 멀리 온달산성이 바라 보인다.

 

충북 영춘(永春)과 전남 곡성(谷城)을 다녀왔다. 두 지역의 공통점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이지만 의외로 닮은 점이 많다. 영춘에는 남한강이, 곡성에는 섬진강이 흐른다. 또 하나 공통점은 험준한 산세를 자랑하는 산악지역이라는 것. ‘골 곡(谷)’ 자를 쓰는 곡성은 이미 ‘골짝나라’로 잘 알려져 있고, 영춘은 십승지의 고장이다. 섬진강과 남한강이 흐르는 골짜기가 많은 영춘과 곡성을 일주일 터울을 두고 찾아갔다. 남과 북의 기온 차가 있다 보니 봄에서 여름으로 치닫는 초록 숲이 깊어가는 모습이 엇비슷했다.

 

선조들의 이상향 십승지(十勝地)의 고장, 영춘


   
영춘(永春)은 소백산맥의 영향으로 면(面) 전체가 험준한 산악지형이다. 형제봉(1178m)·태화산(1027m)·신선봉(1389m) 등 1000m급 고봉들이 줄줄이 솟아 있다. 강원도 영월과 경상북도 영주 땅이 인접해 있어 지리적으로 가깝다 보니 오래전부터 상업적·문화적 교류가 빈번했다. 그래서인지 접경지 주민들은 두 지역 사투리가 묘하게 섞여 있다. 지금이야 행정상의 구분을 명확하게 하지만, 먼 옛날에는 굳이 그런 지역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더구나 고개를 기준으로 넘나들었던 사람들은 서로 사돈을 맺기도 했고, 농사를 짓기 위해 왕래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시절 삼도(三道)는 한 동네였다.

영춘초등학교 정문 앞 도로가 영춘에서 가장 번화했던 길이다. 여전히 온갖 상가들이 밀집돼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닫았고, 간판만 결려 있는 경우도 있다. 문을 열었는지 닫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작고 허름한 점포들이 과거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춘 면소재지가 있는 상리를 먼저 찾았다. 아침부터 학교 운동장에서 앰프 소리가 요란하다. “아~아! 마이크 시험 중입니다.” 무슨 잔치라도 열리는 것일까. 무려 111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춘초등학교 운동장에 들어서자 만국기가 휘날린다. 영춘초등학교 총동문회가 열리는 날이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다는 64회 졸업생 한명수(54)씨는 오랜만에 동창생들과 만나는 이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코흘리개들이 벌써 반백의 나이가 되었으니 얼마나 할 얘기가 많겠어요. 자식 얘기, 건강 얘기, 또 50여년 전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학교 다니던 시절 얘기들을 나누다 보면 웃고 울고 그래요.”

구인사가 있는 백자리 으내기골에서 왕복 3시간을 걸어 다녔다는 한명수씨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소백산 자락 대산골 아이들은 왕복 4시간을 걸어 다녔다. 학교가 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보니 느티마을 친구들은 나룻배를 타고 다녔고, 산 두어 개를 넘어 다니는 것은 보통이었단다. 그러다 보니 지각하기 일쑤였고, 비가 많이 와서 강물이 불면 강 건너 아이들은 학교를 가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기도 했다. 종이가 없어 싸리나무를 잘라 흙바닥에 글씨 연습을 하면서도 그 시절만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고 했다. 5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영춘초등학교의 현재 전교생은 68명이다. 최고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1971년에는 전교생이 1144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지금과는 비교 불가다.

 

40년 째 한 자리에서 신발을 팔고 있는 대흥상회 손황금 어르신. 손님이 오든 안 오든 단 하루도 가게 문을 닫은 적이 없다.

 

영춘초등학교 정문 앞 도로가 영춘에서 가장 번화한 길이다. 아니, 가장 번화했던 길이다. 여전히 상가들이 밀집되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가게는 문을 닫았고 간판만 걸려 있는 경우도 있다. 문을 열었는지 닫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작고 허름한 점포들이 그저 과거의 모습을 짐작게 할 뿐이다. 물론 시대에 맞게 변화한 점포도 있다. 지업사에서 잡곡, 고추, 신발을 함께 팔고 꽃가게는 커피 집을 겸한다. 돈가스집도 있다. 귀농귀촌 인구가 늘면서 생겨난 변화다.

대흥상회는 40년째 신발을 팔고 있다. 하루 한 켤레, 아니 사나흘에 한 켤레 팔릴까 말까 하지만, 손황금(85) 어르신은 단 하루도 가게 문을 닫은 적이 없다. “여기는 산골짝이 많아서 다들 어렵게 찾아오는데 문을 닫아 봐 얼마나 서운하겠어. 그래서 손님이 오든 안 오든 문은 열고 있는 거지.” 여름에는 고무신, 겨울에는 털신, 농사일에 필요한 장화, 유명브랜드 제품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짝퉁 운동화도 있다. 그냥 나오기가 섭섭해서 아내에게 줄 요량으로 고무신 한 켤레를 샀다. 눈치 빠른 어르신은 “그냥 가도 되는데” 하신다.

 

하류의 군간나루와 영춘나루, 상류의 용진나루와 함께 단양과 영월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던 느티나루 자리에 북벽교 다리가 놓였다.

 

느티마을 강변의 제2 단양8경 중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린 북벽. 남한강 물 속 깊이 뿌리를 내린 깎아지른 듯한 석벽의 풍광이 빼어나다.

강변 뚝방길을 따라 남한강으로 내려섰다. 1989년 북벽교 다리가 놓이면서 사라진 느티나루가 있던 곳으로 하류의 군간나루와 영춘나루, 상류의 용진나루와 함께 단양과 영월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다. 북벽교를 건너면 느티마을이다. 예로부터 단양 지역에 전해오는 ‘1느티 2병두 3덕천’이라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강가에 들이 넓게 펼쳐져 있어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첩첩산중에서 가장 넓은 들을 가진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얘기다. 느티마을에서 강변으로 내려서면 우뚝 솟은 바위절벽이 북벽이다. 기존에 선정한 단양8경 외에 추가로 선정한 제2 단양8경 중 첫 번째로 이름을 올렸을 만큼 남한강 물 속 깊이 뿌리를 내린 깎아지른 듯한 석벽의 풍광이 빼어나다.

남한강을 뒤로하고 온달산성으로 향한다. 산성 아래에는 전시관인 ‘온달관’과 중국 수·당시대 건물, 삼국시대를 무대로 한 드라마 세트장이 있다. 오밀조밀하게 55채의 건물을 유심히 관찰하며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역사학적 의미도 크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친숙한 건물들이기 때문이다. 너나 없이 “아, 맞다. 그 드라마에 나왔던 장소다” 한다. 드라마 세트장을 돌아나오면 온달동굴로 이어진다. 지역 특유의 석회암동굴로 왕복 800m의 통로를 따라 어렵지 않게 관람할 수 있다.

 

온달관광지에는 전시관인 온달관과 중국 수·당시대 건물, 삼국시대를 무대로 한 드라마 세트장이 있다. 오밀조밀하게 55채의 건물을 유심히 관찰하며 돌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왕복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온달산성을 오르면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영춘면소재지, 산사면마다 달라붙은 마을들, 겹겹이 쌓인 산 그림자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눈앞에 펼쳐진다.

 

남한강이 곡류하는 영춘의 전경을 보기 위해서는 왕복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온달산성을 올라야 한다. 거리는 약 1㎞ 남짓이지만 대부분 나무계단이라 쉽게 보고 올랐다가는 큰코다친다. 특히 여름철에는 반드시 모자를 쓰고, 식수를 넉넉히 준비하는 게 좋다. 온달산성은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보은의 삼년산성, 상주의 견훤산성과 함께 가장 멋진 산성으로 꼽았을 만큼 내려다보이는 풍광이 빼어나다.

남한강변 해발 427m의 성산(城山) 정상부에 둘레 682m의 석회암과 사암으로 쌓은 석축산성으로 성벽에 올라서면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과 영춘 면소재지, 산사면마다 달라붙은 마을들, 겹겹이 싸인 산 그림자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눈앞에 펼쳐진다. 1시간 내외 걷는 수고로 이런 절경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온달산성은 온달장군이 최후를 맞이한 곳으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의 설화가 그것이다.

산성에서 내려와 남한강을 뒤로 하고 베틀재(651m)를 넘었다. 한여름 날씨에 버금가는 더위를 피하고 영춘의 또 다른 모습을 만나기 위해서 이제부터는 첩첩산중으로 들어간다. 영춘을 십승지의 고장이라고 한다. ‘십승지’는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이 전하는 기록에 기인한다. 십승지는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이다. 전란을 자주 겪으면서 좀 더 안전한 곳이 필요했고 유유자적 자연과 벗하며 살고자 했던 옛 선인들이 찾던 무릉도원이다. 지역마다 달리 전하기는 하지만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곳이 바로 영춘면 의풍리 일대다.

 

 베틀재 아래 의풍 삼거리에서는 좌회전하면 강원도 영월이고 우회전하면 경북 영주 땅이다. 의풍리는 선조들의 이상향인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이 전하는 십승지 중 한 곳이다.

 

베틀재를 넘으면 의풍 삼거리. 좌회전하면 강원도 영월이고 우회전하면 경북 영주 땅이다. 불과 십수년 전만 해도 승용차로는 절대 갈 수 없었던 오지 중의 오지였던 이곳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것은 바로 영월 땅 노루목에 있는 감삿갓유적지 때문이다. 그리고 가까운 시기에 와서는 도보여행 코스인 ‘소백산 자락길’이 열리면서부터다. 의풍리는 사방 어디로든 길이 뚫려 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한다.

영주 땅 고치령과 마구령이 그렇다. 승용차 한 대 겨우 지나다닐 정도로 좁은 산길은 걷기에도 좋을 숲길이다. 특히 한여름이라면 하늘을 가린 원시림이 여느 휴양림 못지않다. 영춘에서 베틀재를 넘어 김삿갓유적지를 돌아보고 마구령을 넘어 부석사로 빠져나가길 권한다. 크게 사람 손을 타지 않은 마을과 자연을 오롯이 만날 수 있는 코스다.

걷기를 즐기는 여행자라면 총 60여㎞ 구간에 걸쳐 7개 코스로 구성된 ‘소백산 자락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그중 제7코스는 십승지 의풍옛길이다. 영춘면사무소에서 출발해 베틀재를 넘어 영월군의 김삿갓묘에 이르는 길로 베틀재는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 3대 소금길로 꼽히던 길. 기존 도로가 확·포장되면서 비포장도로인 옛길이 그대로 남아 있다.

 

111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춘초등학교 교정의 개교 100주년 기념비

 

고려시대부터 우리나라 3대 소금길로 꼽히던 베틀재 옛길이 소백산 자락길7코스 십승지 의풍옛길이 되었다. 영춘면사무소에서 출발해 베틀재를 넘어 영월군의 김삿갓 묘에 이르는 길로 도보여행자들이 많이 찾는다.

 

여행 Tip
   
영춘은 중앙고속도로 제천IC나 북단양IC가 들목이다. 제천에서 영월 가는 38번과 59번 국도를 타거나 단양에서 남한강을 따라가는 522번 지방도로를 탄다.

구인사와 온달 관광지가 인접한 영춘 면소재지이지만 관광지를 벗어나면 전혀 딴 세상이 펼쳐진다. 산촌답게 관광지구에는 산채정식과 비빔밥, 청국장 등 토속음식을 내는 식당이 즐비하다. 면소재지에는 탕수육 맛이 좋기로 소문난 ‘금강반점’(043-421-0300)과 산골에 어울리지 않는 수제 돈가스와 일식 카레, 스파게티를 내는 ‘돈·카·스’(010-9189-3489)가 있다.
   
   단양군 문화관광 http://tour.dy21.net


   

 

 

섬진강과 보성강이 흐르는 산촌(山村), 곡성

 

▲ 태안사 입구 보성강. 섬진강은 알아도 보성강은 잘 모른다. 덕분에 개발의 손길을 덜 타면서 여전히 촌스러운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곡성 하면 영화 ‘곡성(哭聲)’을 먼저 떠올릴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곡성의 ‘곡’은 ‘골짜기 곡(谷)’이다. 영화 속 내용과는 전혀 다른 뜻. 골짜기가 많다는 의미로 실제 오곡, 죽곡, 석곡, 침곡, 호곡 등 곡(谷) 자가 붙은 지명이 수두룩하다. 한때 곡성군에서는 ‘골짝나라’라는 슬로건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곡성의 취약한 부분을 부각시켰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전라선 폐철로를 이용한 레일바이크와 증기기관차 여행이 대박을 쳤다. 영화 ‘곡성’도 마찬가지다. 부정적 여론으로 지역 이미지에 타격을 받지 않을까 우려도 있었지만 오히려 호재가 되었다.

 

국가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침실습지. 구멍이 숭숭 뚫린 철판다리를 건너 강변을 산책할 수 있다.

 

곡성 기차마을 증기기관차 종점이 있는 가정역 부근의 섬진강. 자전거 하이킹과 도보여행자들의 천국이다.

 

곡성 여행은 최소한 1박2일의 일정은 잡아야 어느 정도 봤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소문난 곳 말고도 돌아봐야 할 곳들이 많다. 그동안에는 곡성 하면 섬진강, 그리고 기차마을 정도의 명소가 있는 곳으로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곡성 구석구석이 죄다 명소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체 관광객부터 나 홀로 여행자까지 다양한 부류의 여행자들이 찾다 보니 취향에 맞는 여행지를 찾게 됐다. 
   
   “저 역시 낯선 땅에 가면 여행자가 되지만, 관청에서 만든 지도나 자료는 이미 다 알려진 곳들이잖아요. 제가 보고 싶은 것은 덜 알려진 속살을 보고 싶은데 말이죠. 그래서 곡성을 방문하는 여행자 입장에서 만들었어요.”

 

여행자들의 아지트, 여행자 카페 1933 오후를 운영하는 추선호 씨. 커피보다 곡성을 팔고 싶다고 했다. 알려지지 않은 곡성의 숨겨진 명소의 정보를 여행자들에게 나눈다.

 

여행자 카페 ‘1933오후’를 운영하는 추선호(44)씨는 발품을 팔아가며 곡성 여행지도를 손수 만들었다. 생면부지의 땅 곡성에 정착해 커피를 내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곡성을 팔고 있다는 말이 맞을 정도로 곡성을 소개하고 알리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도보 여행자를 위한 지도와 먹거리·잠자리 정보, 영화 ‘곡성’ 이야기를 ‘곡성마실’이란 이름으로 묶었다.

지도대로라면 하루이틀로는 부족할 정도다. 특히 천천히 걸어서 돌아볼 수 있는 읍내 골목길이 인상적이다. 사람 냄새 깊게 배어 있는 골목에서 사람을 만나고 예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낡은 건물을 만난다. 허기질 무렵이면 눈앞에 백반집이 나타나고, 편하게 누워 한낮의 오수를 즐길 수 있는 곳도 소개돼 있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늘 나만의 여행하던 방식을 버리고 현지인이 추천하는 코스대로 따라가 보기로 했다.

 

곡성 전통시장 풍경. 3,8장인 곡성 장날이면 손수 기른 채소를 들고 나오는 어르신들이 많다.

 

장날 버스를 기다리는 어르신들. 여전히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산골 어르신들은 현대식 마트보다는 나들이 가듯 장터로 나온다. 친구를 만나고, 막걸리 한 잔을 나누는 재미가 쏠쏠하기 때문 아닐까.

 

오일장이 열리는 기차마을 전통시장에서 출발했다. 3·8장인 곡성장은 기존 장터에서 300m가량 이전했다. 이제는 다 지나간 추억이 되었지만, 영화와 드라마에 많이 등장했던 옛 장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낡고 허름한 양철지붕에 커다란 가마솥을 걸고 팥죽을 쑤고, 국밥을 끓여 내던 음식점들. 대부분 40~50년 이상 한자리를 지키던 곳이다. 이 역시 2008년 새 장터로 모두 옮겨왔다. 그렇다고 옛맛까지 따라오진 못했나 보다. 분명 사람은 같은데 맛은 예전 같지 않다. 까다로워진 입맛 탓이겠거니 하지만 아마도 빗물이 줄줄 새던 그 양철지붕 아래에서 먹던 맛을 그대로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장터에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멋진 도로를 건너면 읍내 중심가로 이어진다. 도로 서편 끝에서 영원천을 따라가는 ‘읍내18길’을 걷는다. 말끔하게 정비한 산책로와 꽃길이 조성된 영원천은 곡성 읍내를 남북으로 흐른다. 여행자 카페 ‘1933오후’가 이 도로변에 있다. 곡성을 처음 방문하는 여행자라면 이곳에서 곡성 관련 자료를 구해 길을 나서면 된다. 영원천을 따라 걷다 보면 1911년에 지어진 곡성읍교회를 만난다. 석조건물로 종탑 옆 계단을 통해 옥상에 오르면 오밀조밀한 낮은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곡성 읍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곡성 읍내 골목길. 사람과 예스러운 분위기의 낡은 건물들을 만날 수 있다.

 

산책로와 꽃길이 조성된 영원천. 곡성여행의 백미는 이 영원천 주변 골목을 돌아보는 일이다.

 

골목을 빠져나와 곡성고등학교 앞 골목으로 나왔다. 단층 붉은 벽돌 건물 한 채가 유독 눈에 띈다. ‘곡성 주조장’ 간판이 걸린 양조장이다. 43년 전에 지어진 붉은 벽돌 건물로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나무문짝은 삐걱대는 소리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내부 구조만 위생적인 시설로 바꾸었을 뿐 모두가 옛날 모습 그대로다. 한창 전성기 때는 하루 300말(5400L) 이상 팔려나갔다지만 지금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부터는 지역 특산품인 꾸지뽕을 주재료로 한 꾸지뽕 막걸리를 출시했다.

곡성중앙초등학교 맞은편 골목에는 ‘옥터성지’인 곡성성당이 있다. 현재의 건물은 천주교인들을 가두었던 옥사 터에 1958년에 건축된 것으로 규모는 크지 않지만 소박하고 예스러운 분위기다. 성당 뒤편에는 당시의 실상을 돌아볼 수 있는 옥터전시실과 옥터학당이 있다. 1815년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벌어진 을해박해를 피해온 신자들이 신앙이 노출된 원거주지를 떠나 이곳에 정착해 생활하던 모습과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당시 신자들을 가두었던 옥사를 복원해 놓았다.

 

증기기관차와 레일바이크를 탈 수 있는 구 곡성역의 기차마을. 사전 예약을 하지 않으면 헛걸음 할 만큼 찾는 이들이 많다.

 

곡성 기차마을 장미공원의 야생화. 늦은 가을까지 피고 지고를 반복한다.

 

교촌마을을 내려서면 죽동제. 동악체육공원과 곡성군 생활체육공원으로 이용되는 주민 편의시설이 있다. 죽동제를 한 바퀴 돌아보는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고, 방죽 안 절반 정도는 연(蓮)밭이다. 이즈음이면 연꽃이 피어날 시기라 군데군데 놓인 나무의자와 정자에서 잠시 쉬어갈 수 있다.

이제 곡성을 대표하는 얼굴마담이 되어버린 기차마을로 향한다. 섬진강 장미공원과 기차마을 공원, 기차마을 생태학습관이 몰려 있는 기차마을에서는 증기기관차를 타고 섬진강변을 달릴 수 있다. 주말이면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좀 한갓진 풍경을 보고 싶다면 기차마을에서 2㎞ 거리에 있는 오곡면 오지리의 섬진강 침실습지를 찾아가면 된다. 그동안 우리들이 봐왔고 알고 있는 강의 모습이 아니다. 국가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곳은 주로 사진가들이 많이 찾는다. 서울에서 섬진강을 사진에 담기 위해 밤새 달려왔다는 이부영(49)씨는 “말로만 듣던 섬진강의 진면목을 제대로 만난 기분”이라고 했다.

읍내를 잠시 벗어나기로 했다. 기차마을 종점이 있는 가정역을 지나 섬진강과 보성강 줄기를 따라 태안사로 향한다. 섬진강을 따르는 17번 국도와 보성강을 따라가는 18번 국도를 탄다. 이 길은 30㎞가 채 안 되는 거리지만 각기 다른 두 강의 풍경과 관광지 분위기와는 정반대의 한가롭고 풍요로운 마을 풍경과 곡성을 상징하는 골짜기의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날 수 있다.

 

천년고찰 태안사 능파각. 일주문으로 향하는 전나무 숲길은 한여름에도 서늘한 그늘을 선사한다.

 

태안사 절집으로 오르는 2km 숲길. 잠시 쉬어가기 좋은 계곡이 바로 옆으로 흐른다.

 

천년고찰 도림사. 물이 맑고 깨끗한 도림사 계곡은 여름철 물놀이 장소로 유명하다. 입구에는 오토캠핑장이 있다.

 

태안사는 천년고찰이다. 선문구산(禪門九山)의 하나인 동리산파(桐裏山派)의 중심 사찰로 절집으로 오르는 2㎞의 숲길이 백미다. 흙길이라 걷기에도 좋지만 간간이 지나다니는 자동차 먼지 때문에 권하고 싶지는 않다. 차라리 능파각 앞에 차를 세우고 일주문으로 오르는 전나무 숲길을 걷길 권한다. 짧지만 한여름 무더위도 날려버릴 만큼 숲그늘이 서늘하다. 곡성에는 태안사 말고도 곡성읍 월봉리 동악산 자락에 도림사도 있다. 여름철이면 계곡에서 탁족을 즐기는 인파로 붐빌 만큼 물이 맑다.

자동차와 증기기관차도 타고, 때론 걷기도 해야 하는 곡성여행은 쫓기듯 돌아보는 여행보다는 하루이틀 묵으면서 느긋하게 즐겨야 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서정적인 두 강, 섬진강과 보성강 줄기를 따라가 보기도 하고, 천년고찰을 찾아 숲길을 산책하는 것도 좋겠고, 장터를 어슬렁거리며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 귀기울여 보는 것도 좋겠다. 장터의 명물인 팥죽이나 국밥에 꾸지뽕 막걸리 한잔 걸쳐 보는 것도 소읍여행의 즐거움이다.

 

곡성 읍내 초입의 메타세콰이어 가로수길.

 

잠시 쉬어가기 좋은 죽동제. 산책로와 연 밭이 있다.


   

 

여행 Tip
   
상·하행 각 6회 정차하는 전라선 KTX를 타면 서울에서 곡성까지 2시간20분 정도면 도착한다. 순천~완주 고속도로 통과 곡성 들목인 서남원IC에서 곡성 간 국도의 확장공사가 완료돼 접근이 쉬워졌다.

곡성 여행의 기점으로 삼아도 좋을 여행자 카페 ‘1933오후’(010-2692-1758)는 곡성 여행 안내와 짐 보관 서비스를 제공하는 여행자들의 아지트다. 
   
곡성에서는 꼭 백반을 먹어야 한다. 저렴한 가격과 푸짐한 상차림, 다 손이 가는 밑반찬이 풍요로운 고장이라는 것을 실감케 한다. 어느 지역에 가든지 ‘군청 앞’은 웬만하면 다 통하는 맛집이 몰려 있다. 곡성 역시 마찬가지로 군청사거리 근처의 ‘딸부잣집’(061-363-6893)은 지역 사람들이 많이 찾는 백반집이다. 기차마을 부근 오곡면 오지리의 제일식당(061-363-2955)도 한정식 수준의 14가지 이상 상차림으로 1인분에 7000원이다.    
   곡성군 문화관광 http://www.gokseong.go.kr/tour/

 

[·사진]  눌산 여행작가

주간조선 [2460] 2017. 6. 5 발행

-- >>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9&nNewsNumb=002460100020

728x90
반응형